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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사충서원 | 2008.05.07 09:08
  이름 : 관리자 | 홈페이지 : 추천수 : 177 | 조회수 :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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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0대왕인 경종(景宗)의 생모 장희빈(張禧嬪)이 경종의 아버지인 숙종(肅宗)왕에게 죄를 지어 사약을 받을 때 소생인 세자와 원한으로 세자의 몸에 위해를 입혀 경종은 이로 인해서 사실상의 신체불구가 되어 버렸다. 이런까닭에 경종은 자식도 없고 정무에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함에 조야간에 후계자를 따로 히택하여 정해야겠다는 여망이 있자,여론의 반영기구인 대간(臺諫)에서 3종의 혈통이 바로 닿는 숙종의 제3왕자 연잉군(延 君후에 영조가 됨)을  세자로 책봉하기로 상소하였다. 이것을 당시의 대신인 영의정 김창집(領議政 金昌集),좌의정 이이명,우의정 조태채(趙泰采),좌의정 이건명(李建命)등 네사람이 이에 협조하여 경종왕에게 품신하니 경종도 대비(大妃)의 전교를 받아 이를 수락하여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렇게되자 이에반대하는 일파에서는 왕이 아직 젊어 시급한 문제가 아닌데 이것을 서두른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라고 모함하여 세자책봉에 가담한 사람들을 모조리 귀양을 보내고 이들 네충신을 죽이니 이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라는 것이다.



  이일이 있은후 3년(1724년)경종이 죽고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영조왕(英祖王)이다. 영조는 즉위한 다음해에 네 대신 이하 희생자 전부를 명예회복시키고 다음에 (1726)3월에 노량진에 사충서원을 건립토록 명령을 내리고 종묘를 짓고 남은 재목을 하사하였다. 이 해8월에 준공되니 원액(院額-서원의 현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고 4대신을 배향한후 제관을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듬해 정미년 10월(丁未年1727)에 영조에 의해 다시 사충서원을 없애라는 명이내리었다.이것은 영조의 등극으로 신미사화때 득세파들이 처벌됨에 따른 상호 보복의 악순환 때문이었다.영조 32년(1756년)에 다시 노량진에 사충서원을 중건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해 가을 죽건과 함께 구액을 다시 내렸다.

  그후 철종 임자년(壬子年)봄에 왕이 수원능행(水源陵行)때에 사충서원에 제사를 지냈고 고종(1868),순종(1909)때도 제사를 친히 올렸다.그후 중건한지 172년만인 1927년 봄에 이곳이 철도용지로 편입되게 되어 고양군 한지면 보광리로 옮겨 지었는데 6.25사변으로 원사가 불에 탄후 수복후 피난민의 판자촌이 들어와 도저히 이곳에 복원할수 없어 1968년 하남시 성산곡동 100번지(현위치)로 옮겨 중건하고 사단법인체로 등록하였다.

  사충서원의 건물은 이전시에 새로 지어서 옛모습은 없으나 그 앞에 있는 묘정비(廟庭碑)는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고 4대신의 영정 또한 원액대대로 보존되고 있어 문화재의 지정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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